book/+모리스 메를로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메를로-퐁티와 지각

skyclover 2010. 4. 25. 18:03
a.인식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문제는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보다는 후설의 문제에 가깝다. 그것은 실존의 문제이기 전에 인식의 문제이다. 그렇기때문에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을 가장 충실히 전개시킨다. 그래서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를 현상학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데 반해서 메를로-퐁티를 실존주의자라기보다는 현상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문제는 지각의 문제로 귀착한다. 그래서 그는 <지각의 현상학>을 저술했다. 왜냐하면 지각은 모든 형태의 앎의 근원이자 귀착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의 세계에서 살기를 결코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적 사고에 의해서 지각을 초월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지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잊기에 이른다"라고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선행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지각된 세계는 모든 합리성, 모든 가치, 모든 존재가 언제나 이미 전제로 하고 있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각은 앎의 고고학, 즉 앎의 근원을 캐고자 하는 현상학이 검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철학적 연구의 대상이된다.
 그렇다면 지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지각의 구조 문제에 접하게 된다. 지각은 하나의 대상과 의식과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각의 문제는 그 대상이 어떻게 의식되는가를, 가장 밑바탕에 있는 원형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있다. 메를로 퐁티는 전통적 지각구조에 대한 이론을 크게 둘로 나누어 들면서 그것들이 다같이 불만스럽다고 비판하면서 그의 독창적 이론을 내세운다. 그가 비판하는 두가지 이론을 그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라고 이름붙인다.
 경험주의는 로크 버클리 흄, 그리고 논리실증주의자로들로 대표되는 이론으로서 메를로 퐁티처럼 지각이 모든 대상에 대한 앎의 원천이라고 보긴 하지만, 그러한 지각을 대상이 의식에 반영되는 현상으로 본다. 여기서 의식은 대상이 일으키는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주지주의는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와 칸트의 초험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지각의 지성의 기능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인간에게 경험 이전에 이성에 의한 선천적 앎이 있으며, 그러한 앎을 토대로 대상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경험이 구성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합리주의는 인간이 태어날 때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는 이성, 즉 지적 기능을 강조한다. 한편 칸트의 초험주의는 이성만에 의한 선천적 앎을 인정하지 않지만, 의식 지적 기본적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선천적인 범주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상으로부터 모든 감각이 위와 같은 범주에 의해서 걸러지고 조직됨을 믿는다. 칸트는 범주라고 부르는 지적 틀이 경험에 선행된다고 믿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기능을 오성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해서 메를로 퐁티가 주지주의라고 부르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지각에 대한 이론은 의식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는 지적 기능을 강조하고, 지각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지적 기능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요리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메를로 퐁티는 위와 같이 이해된 경험주의와 주지주의를 다같이 배격한다.